나의 이야기/가족 이야기

3박4일 동안 체험한 아내가 하던 집안 일

빈스 윙 2011. 11. 12. 08:00

아내가 며칠 집을 비워야 하는 일이 생겼다. 화요일 아침 6 20에 모여서 34일간 무슨 교육을 받으러 간다는데, 월요일 저녁부터 새벽에 출발장소로 갈 일을 걱정한다. 6시 20까지 출발장소로 가려면 한 시간 전에는 집에서 나서야 하는데, 그 시간에 지하철이 있을까 하고 묻는다.

 

이런 식으로 묻는 것은 출발장소까지 데려다 달라는 금성에서 온 여자들이 하는 표현이다. 이 때 인터넷을 찾아서 지하철 첫 차가 몇 시에 있으니까 시간이 충분하겠다고 말하는 화성에서 온 남자들이 있다면 이 기회에 금성에서 여자들이 쓰는 표현과 언어도 조금은 알아두면 좋을 것이다.

 

내가 골프 친다고 새벽 5에 집을 나선 것이 한 두 번이 아닌데, 그리고 오랜만에 아내가 세상구경(?)을 하고 오겠다는데 안 데려다 주면 양심도 없는 놈이라고 신문에 날까 봐 두려워서(?) 새벽같이 일어나 출발장소로 데려다 주었다. (이 정도면 나도 아주 형편없는 남편은 아닌 것 같은데, 이 글을 읽는 금성 여자분들은 당연한 거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아내를 떠나 보내고 곧장 출근해서 집에서 자고 있는 아이(5, 2)들을 전화로 깨워서 차려 놓은 아침 먹고 등교하라고 일렀다.

 

아내가 집을 떠난 첫 날 저녁메뉴는 김치찌개다. 물론 아내가 미리 만들어 놓은 것을 그냥 차려서 먹기만 하면 되었다. 밥도 아침에 해 놓아서 저녁까지는 충분했고, 햇반도 왕창 사다 놓아서 모자라면 그걸로 때우면 되고, 그저 저녁 먹은 설거지와 다음 날 아침에 먹을 밥만 하면 되었으니 별로 어려울 것은 없었다.

 

[이렇게 식단까지 짜 놓고, 미리 준비도 다 하고 간 아내의 정성이 정말 대단하다]

 

둘째 날 아침메뉴는 사골 국이다. 이 역시 냉장고에 보관해둔 사골 국을 데워서 어제 예약취사로 지은 밥과 함께 먹었으니 집안 일 정말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보다는 항상 새벽2나 돼서야 잠자리에 드는 큰 아들 깨우고, 작은 아들 학교 갈 준비물 챙기는 것이 더 어려웠다. 다행히도 엄마 없이는 못 살 것 같던 두 아들이 의외로 각자 알아서 할 일을 다 한다.

 

아침시간에 하는 일들이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왠 시간이 그리도 빨리 가는지 설거지는 저녁에 하기로 하고 두 아들 챙겨서 학교 보내고 출근을 하니 지각이다. 저녁에는 멀리 해외로 가는 친구가 있어 송별회를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서, 훈제오리고기를 사다가 먹으라 하고 조금 늦은 시간에 귀가했다.

 

하루 종일 별로 과중하지도 않은 업무에 시달리다 집에 돌아오니 전쟁터가 따로 없다. 아침에 먹은 그릇과 저녁에 먹은 그릇들이 씽크대를 완전히 점령해 버렸고, 식탁 위에는 오리고기 먹은 흔적을 남기려고 했는지 마스타드 소스가 여기 저기 떨어져 있다. 냉장고에 있던 반찬들을 챙겨 먹었는지 오리고기하고만 먹었는지 알 수 없지만, 고맙게도 반찬통은 냉장고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밀린 설거지를 해 놓고, 간단하게 집안 정리하고, 다음 날 아침에 먹을 밥이 있는지 밥통을 열어보니 아침까지는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모자라면 햇반이 있으니까 염려할 것도 없다.

 

일도 아닌 것 같았던 집안 일을 조금 맛보고 나니 집안 일이라는 것이 시간을 잡아먹는 귀신이다. 그렇게 일을 마치고, 다음 날 블로그에 올릴 글을 점검하고 나니 새벽2. 다음 날은 수학능력시험을 보는 날이라서 늦게 등교한다고 한다. 작은 아들은 일찍 등교해서 친구들과 논다 하고, 큰 아들은 9에만 일어나면 된단다.

 

 

셋째 날, 내가 늦잠을 잤다. 작은 아들은 이미 우유와 콘프레이크로 아침을 해결하고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큰 아들은 세상 모르고 잔다. 원래는 오늘 아침도 사골 국을 먹기로 했었는데, 아침부터 뭔가 꼬이기 시작한다.

 

허둥지둥 씻고 자고 있는 큰 아들을 뒤로 하고 출근을 했다. 또 지각이다. 그런데 출근을 하면서 스마트폰으로 새벽까지 작업해서 올린 블로그를 확인해 보니 다음뷰에 올라와 있지 않았다. 8 다음뷰에 올라가도록 예약을 해 놓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확인해보니 10일이어야 하는 날짜가 한 주 늦은 17일로 되어있었다. 신호대기 중에 날짜를 변경했다.

 

날짜를 잘못 예약하는 바람에 통째로 날려 버리고 우여곡절 끝에 다시 살린 포스트 ;

골프공의 새로운 장을 여는 레진(RZN)코어 - http://blog.daum.net/beanswing/565

 

그런데 사무실에 도착해서 보니 사진은 모두 사라지고 텍스트만 남아있는데 띄어쓰기 없이 모든 문자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도 추천을 해 준 분들에게는 감사하지만, 그렇게 방치할 수는 없어서 모두 삭제하였다. 3일 정도 정말로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작품인데 그렇게 되고 보니 머리가 하얘지고 어떻게 표현하기 힘든 감정들이 나를 정신 없게 만들었다.

 

부랴부랴 업무 틈틈이 삭제해버린 포스트를 다시 작성하다 보니 시간이 10 넘었다. 그런데 그 때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큰 아들 깨워야 하는데 깜빡 한 것이다. 미안한 마음에 아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답이 없다. 얼마 간의 시간을 기다리다가 또 보냈다. 역시 답이 없다. 엄청나게 화가 났나 보다. 지각을 해서 벌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정신 없는 상황에서 날려 버린 포스트를 완성했는데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용이야 그대로 남아 있었으니 그대로 살리면 되었지만, 사진 배치가 왠지 전날 작성한 것과는 달리 매우 엉성해 보였다. 그래도 시간에 쫓겨서 다음뷰에 올리고 나니 11 다 되어간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업무를 보는데 오후에 직원이 팩스로 들어 온 부고장을 하나 들고 온다. 거래처 사장님 모친상이란다. 안 갈 수 없는 자리다. 두 아들의 저녁이 걱정된다. 그러던 차에 큰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생각보다 목소리가 밝았다.

 

아빠! 오늘 정말 웃겼어요. 일어나보니까 집에는 아무도 없고 시간은 9시40 거예요. 그래서 큰일났다 지각이구나 하면서 3분만에 학교까지 뛰어갔어요. 엄청 혼날 줄 알았는데 오늘 수능시험이라서 그런지 선생님께서 아무 말씀 안 하셨어요.”

 

아마도 혼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냥 무사히 넘어간 것이 굉장히 기쁜 모양이다. 저녁메뉴는 비빔밥이었는데, 적당히 챙겨 먹으라고 일러두고 장례식장에 들렀다가 약간 늦게 귀가했다. 아내가 준비해 둔 비빔밥 재료는 고스란히 남아있었고, 라면봉지와 스프가루가 주방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무엇을 챙겨 먹었는지 싱크대에는 또 그릇이 가득하다.

 

적당히 정리하고 그 날 날려버리고 다시 쓴 포스트가 마음에 안 들어서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낮에 잠깐 골프연습장에 들러서 준비한 자료를 가지고 비슷한 주제로 다시 글을 썼다. (골프장비가 스코어의 10%를 좌우한다면? - http://blog.daum.net/beanswing/565) 이번에는 날짜를 확실하게 확인하고, 다음 날 소풍 가는 작은 아들 아침을 꼭 챙겨 먹이리라 다짐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아내가 집을 떠난 지 나흘째 되는 날이다. 눈을 떠 보니 소풍 가는 아들은 이미 떠나고 없다. 밥통을 보니 밥이 그대로 있다. 그리고 씽크대와 식탁에는 우유와 콘프레이크를 먹은 흔적이 있다. 소풍 도시락은 다른 학부모에게 부탁했다는데 제대로 챙겨 먹을지 약간은 걱정도 되고, 소풍 가는 아들 얼굴도 못 보고 쿨쿨 잠만 자고 있었던 내가 부끄러워진다.

 

부리나케 큰 아들을 깨워서 사골 국 끊여서 먹여 보낸 게 그나마 부끄러운 내 자신에게 위안이 되었다. 아내가 집을 떠나 있는 동안 나는 매일 지각을 했다. 34일이 마치 한 달은 된 것처럼 정신이 없었다. 두 아들에게 내가 해 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비어 있었던 아내의 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졌다.

 

아침에는 왜 그리도 시간이 빨리 가는지 매일 아침 제일 먼저 일어나서 학교에 가는 두 아들과 출근하는 나를 위해 이것 저것 준비하는 아내의 손길과 마음이 분주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평소에 씽크대에 설거지거리가 쌓여 있으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는데, 집안 일에 바쁘다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동안 집안 일은 나 몰라라 방치했고, 아이들 교육문제도 아내의 몫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집안 일이 바깥 일보다 더 힘들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 마디로 나에게는 숨가쁜 3박4일 이었다.

 

우리나라 엄마들, 정말 대단하다.